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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40년이 지난 후, Talking Heads의 가장 가치 있는 멤버는 여전히 가장 낮게 평가받고 있다

Carrie Courogen(원문 보기)

당신이 토킹헤즈의 대표곡들을 들을 때면 그 음악에는 하나의 두드러진 공통점이 있다. : 티나 웨이마우스(Tina Weymouth)의 훵키하고 멜로디 넘치는 베이스라인. 그가 없었다면 “Psycho Killer”나 “Burning Down The House”, 그리고 “Once in a Lifetime”이 없었을 것이다. 즉시 알아들을 수 있는 그루부는 곡의 가사가 사라지는 순간에도 우리의 뇌 속에 스며들어 있다. Jay-Z에서부터 최근에는 셀레나 고메즈(Selena Gomez)에 이르기까지 계속 샘플로 사용되고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던 것은 웨이마우스의 베이스라인이지만 이것들을 창작해낸 그의 역할은 아직까지 거의 논의되고 있지 않다.

웨이마우스의 기념비적인 “Psycho Killer”의 리프에 기초해서 만든 고메즈의 “Bad Liar”가 발매되자마자 평론가들은 데이빗 번(David Byrne)이 그 영향력있는 샘플에 기여한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식적인 승인에 초점을 맞추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프론트맨을 뒷받침했던 여성이 종종 그러했던 것처럼 웨이마우스에 대한 평가 역시 일종의 부가적인 영역이었다.

66살의 웨이마우스 또한 명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난 그런 것에 대해 내 자신이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해요. 내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죠.” PAPER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웨이마우스가 한 발언이다. “난 여전이 여기 있고 내 할 일을 해요. 결론적으로는 그게 진정한 모든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가 아니라요.”

최근의 인터뷰에서 토킹헤즈의 드러머인 (그리고 웨이마우스의 남편) 크리스 프란츠(Chris Frantz)는 “토킹헤즈에서 티나 웨이마우스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저 또 다른 어떤 밴드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왜 그가 그렇게나 중요한 역할을 했던 어떤 밴드의 유산에서 그는 서서히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평론가들은 종종 웨이마우스가 킴 고든(Kim Gordon)에서 에스터 하임(Este Haim)에 이르기까지 많은 여성 베이스 연주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하곤 한다. 그러나 다른 더 많은 이들에게는 아니다. 사람들은 그가 (프란츠와 함께) 번의 난해한 아이디어를 리듬 섹션의 범위 내에서 캐치하고 상징적인 팝뮤직으로 변환하는 비법을 발견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의 프로파일을 심도 있게 적지 않는다.

그의 베이스라인은 밴드의 맥박이 되고 다운타운 펑크를 새로운 어떤 사운드로 만들어냈다. : 팔리아먼츠(Parliament)와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의 쏘울이 넘치고 훵키한 즉흥곡과 캐롤 케이(Carol Kaye)의 견실한 락음악의 춤추기 쉬운 컴비네이션. 이 사운드는 확실하게 쭉 뻗어나가는 멜로딕 훵크에서 아프리카에 영향받은 복합적인 리틈의 댄스 음악에 기초한 날카로운 그루브에 이르기까지의 넓은 스펙트럼을 커버했다. – 그와 프란츠가 후에 그들의 영향력있는 그룹 Tom Tom Club으로 개발했던 그 사운드.

그러나 웨이마우스에 대해 쓸 때에 그는 기껏해야 유머 감각 없이 잔소리가 심한 여자에서 심지어 번에 초점을 맞춘 이들에 의해 “락의 레이디 맥베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묘사되면서도 그의 음악가적 기질은 무시되어 왔다. 이러한 수사는 드문 것이 아니다. – 단지 그들이 창출하는데 기여했던 역사로부터 지워지고 있는 여성 아티스트들의 더 커다란 문제의 징후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주 흑과 백의 극단적인 개성으로 묘사되곤 하고, 그들의 성별(gender)이 언급되고 –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재능 있는 – 혹은 남성 평론가들의 렌즈를 통해 철저한 관찰된 중에 제대로 형성된 남성 동료들의 그늘 속의 배역으로 정의된다.

데이빗 바우맨(David Bowman)의 2002년 전기 This Must Be The Place : The Adventure of Talking Heads in the 20th Century를 보자. 그는 번을 이 이야기에서 겸손하고 친근한 주창자(protagonist)이자 진정한 영웅으로 묘사하면 반면, 웨이마우스를 묘사하길 적대자(antagonist), “다소 예민한”, “카톨릭 성인의 분위기가 나는, 또는 비극적으로 다리를 저는 프리마 발레리나. 또는 앤디 워홀을 저격했던 발레리 솔라니스(Valerie Solanis).”1 이 정도는 바우먼이 친절한 것이다. 나중에 그는 그를 “로체스터(Rochester)의 아내, 미친 인간”으로 비유하고 그의 기억들을 “유해하다”고 규정했다.

평론가들은 종종 디테일을 대충 묘사한다. 번이 밴드에서의 그의 역할을 위해 그를 세 번 오디션했다고 한다. – 다른 멤버들에게는 요구하지 않았던 것. 2015년의 다큐멘터리 Girls in Bands에서 그는 번이 그에게 “여성에게 위험한 곳이기에 이 큰 세상에서 진정한 여성의 역할은 없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일이 꼬일 때마다 번은 웨이마우스를 탓했다. “데이빗이 불안해할 때마다 내가 그의 괴롭힘 대상이었다. 그가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그에 대해 날 괴롭히곤 했어요. 내내 내겐 고통이었죠.” 그는 바우먼에게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티나 웨이마우스는 그가 대체로 그의 다른 여성 등료들과 다르게 그렇게 확신을 주는 인물이 아니어서 충분한 신뢰를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잘 해낸 것, 음악을 연주하는 것의 더 이상을 능가하고 싶지 않아요.” 1979년 Creem에서 그가 한 말이다. “난 여성임을 이용하지 않았는데 그런 것들을 아껴두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죠.”

그는 임신 중에도 토킹헤즈의 공격적인 세계 공연에 따라나섰던 여성이고, 진통 중에도 베이스 트랙을 녹음했다. 데이빗 번의 그늘에서 라이브를 하는 것과 같은 거친 진실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던 여성이다. : “몇 해 동안” 로스엔젤레스타임스에 그가 한 말이다. “사람들은 내게 데이빗에 대해서만 물어봤고, 난 대답을 잘 했었죠.”

그는 가혹하도록 충성을 했고 대단히 신뢰할 만 했으나 팡파레를 원하지 않았다. 밴드를 하는 것은 프란츠의 꿈이었다. 그가 도쿄의 레드불뮤직아카데미(Red Bull Music Academy)에서의 2014년 강연에서 회고하길 그는 거의 2년 동안 베이스 주자를 찾아 헤맸다. 결국 아무도 나서지 않았고 웨이마우스는 밖에 나가서 거의 그만큼 큰 베이스를 사왔다. 그리고 밴드에 끼어들었다.

“밴드가 첫 라이브를 할 때까지 난 단지 5개월 동안 베이스를 연주했어요.” 같은 강연에서 그가 설명했다. “난 정말 펑크였던 셈이죠. 철저한 독학자였어요. 수업을 듣지도 않았죠. 아무도 어떻게 연주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그는 구멍을 발견하고 어떻게 다른 사람의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여성들이 몇 세기동안 보답을 바라지 않고 해온 일이다. 밴드 멤버들이 그들의 초기 시절을 회상할 때 그들은 그가 번과 프란츠와 함께 온방이나 목욕탕도 없는 상업용 다락에서 살며, 그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주고, 머리를 잘라주고, 공연장까지 운전을 해주고, 베이스 주자와 로드 매니저라는 이중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회고한다.

티나 웨이마우스는 선구자였고 그 영향력은 특히나 여성들에게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남아있다. 그는 그만의 길을 지치지 않고 나아가고 있고, 프란츠와 새 음악을 만드는 와중에 멘토역을 하거나 더 젊은 아티스트들과 협업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좋았던 것 하나는 내가 여성이어서 겪었던 문제에 대해 한번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에요.” 1981년 The Face에서 그가 한 말이다. “나는 똑 같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다른 이들을 의기소침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난 그 길이 오르막을 오르는 수레처럼 보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실제론 그랬지만요.”
여성은 때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비록 웨이마우스가 스스로 주목받는 것이나 여성으로서의 시도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했던 것이 상황을 복잡하게 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것은 일종의 캐치22(catch-22)다. “나는 언제나 페미니스트였어요.” PAPER에서 그가 한 말이다. “난 단지 언제나 그 질문을 받는 것이 싫었어요. 그건 나를 ‘날 바라볼 때 생각나는 것이 그게 다에요? 여성으로서? 날 아티스트로 보지 않아요? 날 뮤지션으로 보지 않아요?’라는 질문에 가두는 것이에요.”

침묵을 지키는 것은 제자들이 그를 베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또한 그를 또 하나의 미스터리로 만든다. 그래서 그 앞에 지나갔던 많은 여성들처럼, 그 역시도 편견에 사로잡힌 비평가들의 투사와 남성들의 속 좁은 생각을, 그의 영향력이 단지 하나의 주석으로 축소되는 것을 참아왔다. 늘 그랬으니까.(Same as it ever was)

  1. 미국의 급진적 여성주의자. 앤디 워홀 미수사건의 범인으로 유명하다.

David Byrne의 새로운 솔로 앨범 소식

오늘 5월 14일 64회 생일을 맞은 David Byrne이 최근 한 인터뷰에서 새로운 솔로 앨범을 준비 중이며 내년 초쯤 발매될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해당 앨범은 음악 동료 Brian Eno와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Brian Eno도 이 사실을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팬에게 전달했다.

My Life in the Bush of Gho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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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 My Life in the Bush of Ghosts를 감상했다. 이 앨범은 어릴 적 소위 “빽판”으로 가지고 있었으나 앨범 전곡을 감상했던 기억은 없다. 앨범의 앞의 몇 곡만 듣고 레코드 장에 처박아두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Talking Heads 유의 뉴웨이브 음악을 기대하고 샀던 터라 어린 마음에 아랍 풍의 연주곡이 지루했거나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Brian Eno와 David Byrne이 Talking Heads는 그대로 남겨둔 채 공동 작업을 통해 완성한 이 앨범의 제목은 Amos Tutuola라는 작가의 1954년 소설의 제목에서 따왔다고 한다. 소설은 읽어본 적 없지만, 어쨌든 수록곡들은 앨범 제목과 얼추 비슷한 분위기로 몽환적이고 이국적이다. 가사가 있는 곡도 있지만, 특별히 가사에 깊은 의미를 둔 것 같지는 않다. Eno의 Ambient 시리즈만큼 철저히 미니멀리즘적이지는 않지만, 가사 역시 연주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의미를 가지는 듯하다.

한편, 녹음 작업은 주로 Fear of Music(1979)의 순회공연과 Remain in Light(1980)의 녹음 사이에 진행됐다고 한다. 출시는 다소 지연됐는데 앨범에 쓰인 많은 샘플들의 지적재산권을 해결하는데 시일이 소요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하튼 앨범은 1982년 출시되었고 출시 당시에는 다양한 비평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렉트로닉과 앰비언스, 그리고 제3세계 음악이 연결된 무정형 스타일의 선구적인 작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명반으로 자리매김했다. Eno 스스로는 이 앨범을 “싸이키델릭 아프리카의 영상”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여섯 개의 상징적인 앨범 커버에 관한 뒷이야기 : Talking Heads의 Speaking In Tong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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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것은 고전적인 커버라기보다는 예술계의 괴짜에 가깝다. 그렇지만 이것이 오늘날의 채색으로 인쇄되어 제공되곤 하는 특판 레코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미상을 수상한 Talking Heads의 Speaking In Tongues의 예술작업은 청록색, 심홍색, 노란색으로 인쇄된 파운드 사진들(found photos)로 점재(點在)되어 있다. 모든 것들은 라우센버그(Rauschenberg)1가 1967년 내놓은 조각 “리볼버”를 근거로 하였는데, 이 작품은 관람자가 스위치를 켜면 중심축을 중심으로 도는 다섯 개의 플렉시글래스 디스크로 구성되어 있다. 제조상의 어려움 때문에 LP는 5만 개 한정판으로 인쇄됐고 높은 가격의 수집품목이 됐다. Byrne은 많은 이들이 도움으로 그 앨범을 디자인했다.

겹치는 작업의 비주얼 효과를 얻기 위해 라우센버그는 보프리(Beaupré)가 “있는 그대로 그리고 비유적으로 농축적인 화려한 색채의 비닐 레코드”라고 정의한 바, 아세테이트2위에 콜라주 작업이 된 사진들을 인쇄했다. 문자 파편들은 거친 패턴들을 별도의 섹션으로 분할하였고, 각각의 부분을 다음 것들로부터 구분하기 어렵게끔 이상한 각도로 형태들이 교차한다. David Byrne의 음악 스타일과 많이 유사하게도 결과는 혁신적이었으며 손쉬운 범주화를 거부하는 테크닉의 혼합이었다. Byrne은 타임스에 “Bob 주위에 있는 것은 종종 어떤 종류의 황홀한 약물 상태에 있는 것과도 같아요. 그는 그의 주위에 이들에게 상자 바깥을 생각하도록 영감을 줄 뿐 아니라 상자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게 하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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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팝아트 예술가 Robert Rauschenberg
  2. 투명 플라스틱 필름

David Byrne의 토킹헤즈 재결합에 대한 최근 견해 급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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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킹헤즈가 1991년 영원히 해산한 이후 이 미국의 락커들의 완전체로서의 재결합은 가능성이 낮거나 거의 없는 것이었다. 2002년의 분기별 락앤롤 명예의 전당의 사전 행사에서의 운좋은 출연자로서의 짧은 공연과 제리 해리슨, 크리스 프란츠, 티나 웨이마우스의 재결합에 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프론트맨이었던 데이빗 번은 지속적으로 경멸 섞인 톤으로 이를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The Creative Independent 와의 새 인터뷰에서 이 주제에 대한 번의 입장은 다소 부드러워졌다. 그는 인터뷰 하는 이가 그 주제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잠정적인 재결합의 장단점에 대해 언급하였다.

“내가 하고자 하는 다양한 일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위해 경계를 늦추지 않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예를 들어 토킹헤즈의 재결합은 어떤 세대에 있어서는 또는 많은 다른 세대들에게 있어서는 믿을 수 없이 성공적인 것이겠지요.” 그는 설명을 이어갔다.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테고 관심도 얻겠죠. 또한 아마도 많은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어떤 이에게는 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멀리 퇴보하는 일이기도 해요.” 그러한 상대적인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번은 궁극적으로 긍정적인 면을 취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무언가를 희생해야 합니다. 돈이 되었든 명성이 되었든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좀 많이 하기 위해 가질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되었든 말입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당신은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어요.” 그래서 이제 어느 곳으로도 향하지 않는 길(a road to nowhere)이 되었다. 불행하게도.

2014 광주비엔날레 슬로건

올해로 10회째를 맞은 <2014 광주비엔날레>는 ‘터전을 불태우라(Burning Down the House)’라는 주제로 열립니다. ‘터전을 불태우라(Burning Down the House)’는 1980년대 초반 유행했던 뉴욕 출신 진보주의 그룹 ‘토킹 헤즈’의 유명한 노래 제목인데요. 이번 <2014 광주비엔날레>에서는 이 주제를 통해 제도권에 대한 저항과 도전, 창조적 파괴와 새로운 출발 등의 의미를 전통적 형태의 예술, 설치, 퍼포먼스, 뉴미디어, 영화, 연극, 음악, 건축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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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Byrne이 언급된 어떤 책의 서문

저술가 피터 캐리는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의 현재보다 과거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한다. 작곡가 데릭 버멜은 창 너머를 바라볼 때 들리는 소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인권운동가 캐롤 보거트는 창밖 하늘을 보며 먼 어딘가를 떠올린다. 음악가 데이비드 번은 그가, 그리고 그를 쳐다보는 사람들을 말한다. 신경외과 의사면서 저술가인 올리버 색스는 자신을 차분하게 만들거나 흥분하게 하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편집자이자 저술가인 벤 소넨버그는 얼핏 보이는 도널드 트럼프의 건물에 화를 내고, 허드슨 강과 저녁노을에 기뻐한다. 게이 탈리스는 유리창 닦이를 고용하지 않아 검댕이로 뿌예진 경치를 감상할 수밖에 없는 사연을 털어놓는다. 교수이자 저술가인 알렉산더 스틸은 풍경이며 일광이 너무 지나쳐 일하려면 창을 가려야 한다고 투덜거린다.[창밖 뉴욕, 마테오 페리콜리, 이용재 옮김, 마음산책, 2013년, 폴 골드버거의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