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na Weymouth of Talking Heads” by Jean-Luc – originally posted to Flickr as Talking Heads.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Chris Frantz처럼 Martina Michae Weymouth 역시 군인가정 출신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해군이었고 어머니는 프랑스인이었다. 그녀는 1950년 11월 22일 캘리포니아의 코로나도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이사를 여러 번 다녔고 하와이, 아이슬랜드, 프랑스, 벨지움, 스위스, 이스트코스트, 웨스트코스트 등지로 옮겨 다녔다. “살아가면서 당신이 아는 것 하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것하고는 큰 차이가 있다. 만약 경험이 당신을 단련시킨다면 당신은 어디서든 살 수 있다. ” 1984년 Guitar Player와의 인터뷰에서 그녀가 한 말이다.
12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워싱톤의 Tufts 여사의 잉글리쉬 핸드벨 링잉 그룹의 일원이 되어서 각지로 투어를 다녔다. “우리는 펜실베니아나 뉴잉글랜드, 그리고 뉴욕 등지의 교회와 학교에서 공연했고 우리 레퍼토리는 오래된 영국 민요나 중세적인 멜로디였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엘리자베스 시절의 의상을 입었다. ” “14살이 되었을 때 스스로 키타를 배웠다. 그러나 몰두하지는 않았다. 나는 공허함을 느끼고 다른 사람에게서 이질감을 느낄 때 가족과 떨어져 방안에 쳐박혀 지내는 타입이었다. 뒤에 나는 치어리더의 단장을 맡았다. 그러나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여전히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고등학교를 싫어한다. ” “나는 독학으로 뮤지션이 되었다. 사실 나는 the Beatles, Bob Dylan, Peter Paul & Mary 같은 포크음악을 들었다. 손가락에 번호를 매긴 그림이 있는 Pete Seeger의 책에서 네 손가락 피킹 스타일을 배웠다. “
그래서 그녀가 비록 여러 해 동안 악기를 연주하고 Artistics와 함께 락앤롤 뮤직을 함께 즐겼지만 그 당시에 밴드에서 연주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Artistics의 팬이었다. “나는 그들의 모든 공연, 모든 연습에 동참하였다. 정말 정말 시끄러웠다. 당신이라면 너무 시끄러워서 50피트안에 접근할 수도 없을 것이다. ” 아마도 그 소란은 그들의 밴드 이름의 잦은 변경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1974년 봄 Artistics가 깨진 후 – 아마도 멤버들이 흩어질 졸업의 불가피성때문이었던 듯 – David는 뉴욕으로 옮겼고 곡을 쓰기 시작했다. Chris와 Tina는 6월에 학교를 졸업했고 9월에 역시 뉴욕으로 옮겼다. 거기서 그들은 여전히 예술세계를 탐험하고 있었고 음악은 즐거운 소일거리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Tina는 베이스를 배웠고 Chris와 함께 1975년 1월 Talking Heads를 조직했다. 그들이 대중 앞에 나서기 6개월 전이었다.
공동작업:
* Nona Hendrix’의 앨범 ‘Nona’에서 싱글 ‘Design For Living’ 백보컬 담당
* Ziggy Marley의 ‘Conscious Party’ 프로듀스(Chris Frantz와 공동작업)
* Ziggy Marley의 ‘One Bright Day’ 프로듀스(Chris Frantz와 공동작업)
* Happy Monday의 ‘…Yes, Please !’ 프로듀스(Chris Frantz와 공동작업)
* Los Fabulosos Cadillacs의 ‘Rey Azucar’ 프로듀스(Chris Frantz와 공동작업)
* Angelfish의 ‘Angelfish’ 프로듀스(Chris Frantz와 공동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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