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싸인을 해주는 Tina Weymouth

으아~ 나 참 기가 막혀서! 토킹헤즈랑 탐탐클럽 LP들을 몽땅 들고 와서는 거리에서 티나웨이마우쓰의 싸인을 받다니. 이거 완전 초초초초 레어아이템이 되어버렸네! 부럽다. 정성스럽게 하나 하나 싸인해주는 티나웨이마우쓰의 다사로운 마음도 와 닿고…. 훈훈한 장면이네요.

Tina Weymouth Quotes

Tina Weymouth 2010.jpg
Tina Weymouth 2010” by Ron Bakerhttp://www.flickr.com/photos/kingsnake/4548855528/in/faves-24788065@N02/.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성공하건 못 하건 뭐가 상관이냐? 음악은 언어다. 그것은 인생의 춤이고 뭔가 얻는 것이 없더라도 너의 인생의 일부분이다.
Make it, not make it? What’s the difference? Music is a language, it’s a dance of life, and it can be a part of your life without being something that earns.

완벽해지기는 어렵다. 정말 그래. 난 이미 어떤 것을 망친 후에 계속 배워나간다.
It’s hard to be perfect, It really is. I keep learning things after I’ve already bungled it.

만약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있으면 계속 음악을 하라. 그게 너를 선택했고 놓아주지 않는거다.
If you have this passion for music, you don’t stop doing it – it chooses you and doesn’t release you.

폴 매카트니와 작업하면 정말 좋을 것 같다. 매우 거만한 일이 아니겠나?
I would really love to work with Paul McCartney. Isn’t that arrogant?

난 원래 베이스플레이어가 아니었다. 그런데 모두가 기타를 연주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날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I wasn’t originally a bass player. I just found out I was needed, because everyone wants to play guitar.

난 유럽에서 토킹헤즈의 오프닝으로 탐탐클럽을 내세우는 두 파트로 나뉜 쇼를 여는 아이디어를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가졌던 최고의 오프닝액트가 되었다.
I think the idea of having the show divided into two parts was that Tom Tom Club opened for Talking Heads in Europe, and it was the best we’d ever had as an opening act.

난 베이스를 연주한다. 그래서 밖에 나가서 소리를 지를 필요가 없다.
I play bass. I don’t have to go out there and screech.

난 예술로 돈을 잘, 그리고 영리하게 버는 이들을 존경한다. 왜냐하면 상업적 측면으로 그 세상은 유지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I have respect for those who make money at art and do it well and smartly, because that commercial aspect keeps the world going and running, in a sense.

난 내 목소리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다. 난 베이스 연주에 집중하고 그 연주가 초지일관하게 유지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노래를 했다면 내 목소리를 날려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I don’t want to wreck my voice. I love to concentrate on playing the bass and keeping it very rock-solid. If I were singing, I would have blown out my voice.

비틀즈조차 그들의 이미지에서 탈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들은 그것에 포획되었었다.
Even the Beatles found it hard to escape their image; they were trapped by it.

데이빗는 순수하게 개념적인 아티스트다. 그는 악기를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었다. 우린 화가였었다.
David is purely a conceptual artist. He didn’t play any instruments or paint or anything. We were painters.

출처

Laura Levine

유명한 사진사 Laura Levine의 말

이 사진은 뉴요커 로커의 커버를 위해 찍은 거예요. 그때는 힙합 씬과 다운타운 씬 사이에 수많은 상호수분작용이 시작되고 있었죠. Tina Weymouth와 Chris Frantz의 새 밴드 Tom Tom Club는 막 그들의 첫 앨범을 내놓았는데, 이 앨범에는 랩과 힙합 비트가 녹아들어가 있었어요. Tina와 Flash는 전에 만난 적이 전혀 없었지만, 금세 아주 친해졌어요. 난 사진찍는 동안 붐박스를 들어달라고 부탁했죠. 그들은 춤추고, 노래하고, 레코드를 교환했어요. 촬영의 에너지는 대단했습니다. 사실 Tina가 최근 내게 말하길 그 촬영 후에 그녀는 Grandmaster Flash를 Talking Heads가 그들의 새 앨범을 녹음하고 있는 스튜디오로 데려가 그를 위해 몇 트랙을 연주했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나중에 Flash는 Tom Tom Club의 “Genius of Love”를 그의 “It’s Nasty.”라는 곡에 사용했죠. 난 음악적 교류가 그 촬영으로부터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사랑스러워요.

어떤 사진인지 궁금하다면?

다른 사진들과 그의 발언 보기

 

Tina Weymouth

Tina Weymouth of Talking Heads.jpg
Tina Weymouth of Talking Heads” by Jean-Luc – originally posted to Flickr as Talking Heads.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Chris Frantz처럼 Martina Michae Weymouth 역시 군인가정 출신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해군이었고 어머니는 프랑스인이었다. 그녀는 1950년 11월 22일 캘리포니아의 코로나도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이사를 여러 번 다녔고 하와이, 아이슬랜드, 프랑스, 벨지움, 스위스, 이스트코스트, 웨스트코스트 등지로 옮겨 다녔다. “살아가면서 당신이 아는 것 하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것하고는 큰 차이가 있다. 만약 경험이 당신을 단련시킨다면 당신은 어디서든 살 수 있다. ” 1984년 Guitar Player와의 인터뷰에서 그녀가 한 말이다.

12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워싱톤의 Tufts 여사의 잉글리쉬 핸드벨 링잉 그룹의 일원이 되어서 각지로 투어를 다녔다. “우리는 펜실베니아나 뉴잉글랜드, 그리고 뉴욕 등지의 교회와 학교에서 공연했고 우리 레퍼토리는 오래된 영국 민요나 중세적인 멜로디였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엘리자베스 시절의 의상을 입었다. ” “14살이 되었을 때 스스로 키타를 배웠다. 그러나 몰두하지는 않았다. 나는 공허함을 느끼고 다른 사람에게서 이질감을 느낄 때 가족과 떨어져 방안에 쳐박혀 지내는 타입이었다. 뒤에 나는 치어리더의 단장을 맡았다. 그러나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여전히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고등학교를 싫어한다. ” “나는 독학으로 뮤지션이 되었다. 사실 나는 the Beatles, Bob Dylan, Peter Paul & Mary 같은 포크음악을 들었다. 손가락에 번호를 매긴 그림이 있는 Pete Seeger의 책에서 네 손가락 피킹 스타일을 배웠다. “

그래서 그녀가 비록 여러 해 동안 악기를 연주하고 Artistics와 함께 락앤롤 뮤직을 함께 즐겼지만 그 당시에 밴드에서 연주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Artistics의 팬이었다. “나는 그들의 모든 공연, 모든 연습에 동참하였다. 정말 정말 시끄러웠다. 당신이라면 너무 시끄러워서 50피트안에 접근할 수도 없을 것이다. ” 아마도 그 소란은 그들의 밴드 이름의 잦은 변경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1974년 봄 Artistics가 깨진 후 – 아마도 멤버들이 흩어질 졸업의 불가피성때문이었던 듯 – David는 뉴욕으로 옮겼고 곡을 쓰기 시작했다. Chris와 Tina는 6월에 학교를 졸업했고 9월에 역시 뉴욕으로 옮겼다. 거기서 그들은 여전히 예술세계를 탐험하고 있었고 음악은 즐거운 소일거리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Tina는 베이스를 배웠고 Chris와 함께 1975년 1월 Talking Heads를 조직했다. 그들이 대중 앞에 나서기 6개월 전이었다.

공동작업:

    * Nona Hendrix’의 앨범 ‘Nona’에서 싱글 ‘Design For Living’ 백보컬 담당
    * Ziggy Marley의 ‘Conscious Party’ 프로듀스(Chris Frantz와 공동작업)
    * Ziggy Marley의 ‘One Bright Day’ 프로듀스(Chris Frantz와 공동작업)
    * Happy Monday의 ‘…Yes, Please !’ 프로듀스(Chris Frantz와 공동작업)
    * Los Fabulosos Cadillacs의 ‘Rey Azucar’ 프로듀스(Chris Frantz와 공동작업)
    * Angelfish의 ‘Angelfish’ 프로듀스(Chris Frantz와 공동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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